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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Juni 2017. 1. 20. 하루, 또 하루/여백이 있는 하루

군함도 2 / 한수산

군함도  / 한수산(韓水山)

발행일 : 2016년 5월 20일.

펴낸곳 : (주)창비


군함도 2


군함도 2 / 한수산

군함도 1권과 2권을 다 읽었다.

1권은 하시마 섬에서의 석탄을 캐면서 겪어야 하는 아픔을, 2권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무서움과 처절함를 이야기 한다.


친일파 집안의 둘 째 아들인 지상은 징용이 나온 형을 대신해서 임신을 한 아내(서형)을 두고 일본으로 끌려가 군함도라고 불리는 하시마 섬에서 석탄을 캐는 일을 한다. 

이곳에서 자유,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나라가 없음을 아파하는 지상은 군함도를 탈출한다.

탈출을 했지만 나가사끼에서도 군함도에서와 비슷한 생활을 하던 중 미군이 떨어뜨린 원자폭탄을 겪게된다.



기다림과 기억.

Page 458~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당신이 돌아오실 걸 제가 믿어야, 그래야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다린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기다리지 않아도 비는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다려야 합니다. 간절해야 합니다. 당신이 오실 때는 제가 기다리는 때라고. 여보, 제가 여기 이렇게 기다리고 있답니다. 돌아오세요.

당간지주를 멀리하고 서서 서형은 저물어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살이 사라진 강물 위에서 은빛 잔물결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어느 첫 새벽 꿈속에서처럼 옥색 두루마기 휘날리며 저 둑길을 걸어오시지 않아도 좋답니다. 먼 길, 지치고 남루해서 오셔도 좋습니다. 헤어져 지낸 어젤랑은 다 내려놓고, 노을 져 반짝이는 소양강 잔물결처럼 고요히 제 품에 안기시면 됩니다.

한 팔에 당신 아들을, 한 팔에 저를 품고 신산했던 세월일랑 풀어버리시면 됩니다. 우리가 살았던 것들, 그 세월··· 그건 지나가버리는 것이니까요. 다만 우리 잊지 않기로 합시다. 뼈에 새기며 산 그 고통의 세월들, 그걸 기억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전하면서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게 합시다.

"어부바, 명조야 어부바."

서형이 명조에게 등을 돌리며 앉았다. 아이가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그런데 넘어지지는 않고 잘도 간다.

"넘어진다. 살살 가라니까."

뒤뚱거리던 아이가 폴싹 넘어진다. 서형이 말없이 웃었다. 그런 거야. 이 녀석아. 무릎이 깨지면서 일어서면서 그렇게 크는 거야. 서형이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렇게 컸네요. 헤어져 산 우리들 사이를 지나간 세월도 어느새 두해가 되다니. 생각해보면 언제인가 싶게 참 짧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겪어내던 그 하루하루는 얼마나 길었던가요. 잊지 말아야겠지요. 그 하루의 궁핍과 고통이 가르친 교훈을. 그래서 이 아이에게 전해야겠지요.

오세요. 당신이 오실 때는 제가 기다리는 때입니다. 제가 기다리기에 당신은 오셔야 합니다.


Page 468~

새벽이 되어서야 비는 그쳤다. 시체를 태우던 자리에는 불 꺼진 나무토막들이 둥글게 봉우리를 만들며 솟아 있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상이 일어섰다. 그래,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가 중얼거렸다.

고향으로 간다. 내 상처투성이 나가사끼여, 잘 있거라. 지상은 폐허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흘러간 날들이여. 나가사끼는 나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잊지 않으리라. 나가사끼는 나에게, 나라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나가사끼에서의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걸 이처럼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거다. 이제 돌아가서, 젊은 아이들을 가르치자. 내 나라 글, 내 나라 말, 내 나라 풍습과 역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나라가 있음을, 아니 되찾아야 할 조국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겪은 고난을 가르치고 기억하게 할 거다. 어제를 잊은 자에게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어제의 고난과 상처를 잊지 않고 담금질할 때만이 내일을 위한 창과 방패가 된다.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은 희망이다.


Page 471~

지상의 발밑에서 물기에 젖은 제비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지상은 그들과 함께 걸었다. 사요나라, 나가사끼. 풀과 꽃이 피어나고 있는 폐허, 나가사끼를 뒤로하고 지상은 고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_ '조지 산타야나'의 <이성의 삶>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 과거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 _ 윈스턴 처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_ 단재 신채호.


2017. 01. 25. 수요일.



 

미쯔비시.

Page 18~

재벌 미쯔비시와 일본 정부의 유착은 1874년의 '사가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무력침략하자는 안을 내세웠다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무사단(武士團)으로 총칭되는 정치가들이 귀향한 후, 그중 한 사람이 고향인 사가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사가의 난이다. 이때 미쯔비시상회는 발 빠르게 2척의 배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무찌르기 위한 정부군의 수송 임무를 맡았다. 그 결과 미쯔비시는 막중한 신임을 받으면서 정부와의 결속을 두텁게 한다.

이어지는 일본 안의 크고 작은 내란에 정부군의 승리를 뒷받침했던 미쯔비시는 1876년 1월 정부로부터 특별한 지령을 받는다. 강화도조약 체결에 대비한 전쟁준비였다. 회사 소속의 토오까이마루를 비롯한 12척의 기선을 이용하여 육군 4,600명, 해군 600명과 함께 군마 209필을 수송하라는 것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쿠로다 전권대사가 군함 6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 가면서, 만약 이 조약의 체결을 조선이 거부,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미쯔비시 측은 병사 3,000명을 태우고 쯔시마에 집결,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대기 중이던 군대를 움직일 필요도 없이 강화도조약이 쉽게 체결되면서 미쯔비시의 군수 수송체제는 3월말로 해제되었다.

조선을 위협하기 위해 쯔시마에 군대를 집결시킨 이 일련의 사태는 미쯔비시와 정부의 밀착은 물론 기업으로서의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따. 정부와의 견고한 협조 속에서 미쯔비시는 군수품 수송을 독점하면서 전쟁과 함께 성장한다. 해운업 조선업 중공업은 물론 타까시마와 하시마의 탄광산업까지,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미쯔비시는 단기간에 재벌이란 거대한 성채를 구축해냈던 것이다.



Page 21~

지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의와 이웃, 아버지의 삶에는 그것이 없다.

정미소란 읍내에서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일본인이라는 지배층과 결탁한 돈의 상징이었다. 그 안락한 소수의 바로 이웃에 헐벗고 억압받는 전체가 있었던 거다. 하나의 민족이 이렇게 뿌리부터 뽑혀 나가고 있는데, 아버지는 바로 그 뿌리를 뒤흔드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영달이나 집안의 번영이나 가족의 안락과 바꿀 수도, 바꾸어서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살기 위해서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변명이 불의를 감쌀 수는 없다. 순사한테 일러바쳐서 끌고 가게 하면 그만이었을 나를 위해, 몸 둘 곳을 마련해서 이렇게 내보내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결코 아버지 편에는 서지 못하리라.



몸부림.

Page 36~

조선인들이 난리다, 난리. 징용공들이 일을 쳤단다. 큰일이 났다. 출근을 한 일본인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이미 노무계 사무실을 접수해 버렸다는 것이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하다니. 놀라면서 명국은 누가 주동이 되어 그런 엄청난 일을 벌였는지 걱정부터 앞섰다. 쟁의가 수습되고 나면 주모자들을 그냥 둘 리 없다. 또 몇 사람 상해서 나가겠구나.

...

노무계 사무실만이 아니라 숙사 앞에도 몽둥이와 곡괭이까지 들고 징용공들이 지키고 있다는 말을 떠 올리면서 명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그라진 잿속에서도 불씨는 다시 살아난다. 하물며 사람이다. 부디, 어릿어릿 장님 파밭 들어가듯 하지만 말아다오.

짚고 있는 목발에 몸을 기울이면서 명국은 금화의 사연도 이 일에 발판이 되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은 아이, 죽어서도 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구나. 하루 사는 게 결국은 하루 더 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거 아니겠어요. 금화를 떠올리며 명국은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사람들이 들고일어나는 데 네 죽음도 불씨가 되었다니, 세상일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넌들 이런 일을 생각이나 했겠니.


Page 50~

"아닙니다. 우선 저쪽에서 나를 원하니까, 나 혼자 가겠습니다."

신철이 그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기서 날 지켜주십시오."

죽창을 든 일본인들 쪽으로 신철이 다가가는 사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신철이, 자네한테 무슨 일이 있다 하면 가만있을 우리가 아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신철이 돌아서서 주먹을 쥔 손을 흔들었다. 와아하는 함성이 일면서 기세를 올리느라 밥그릇이며 철판조각들을 두들겨댔다. 앞을 막아선 일본인들이 신철을 향해 죽창을 겨누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신철은 자신을 겨눈 죽창을 내려다보았다. 이 대나무 긑이 내 피를 부르고 있다. 아니 조선인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맞서 싸워서 개처럼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가 노렸던 건 이 저주받은 섬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게 하는 거였어. 이미 우리는 사람들을 빼돌렸어. 난 단칼에 이놈들의 멱통을 딴 거다.


Page 70~

우석이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우석은 쏟아지는 빗발 저편 어둠 속에 파묻힌 하시마를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저 캄캄한 곳에 무엇이 있었으며, 어떻게 살았던가. 순간 우석은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쏟아지려는 무언가를 애써 참았다. 이건 눈물인가 분노인가. 많은 사람이 저기 남는구나. 신철이, 만중이, 재덕이, 학철이...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에 금화가 있었다. 언제가 되어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얼굴 하나. 금화가 있었다.



남편을 찾으러...

Page 76~

나도 참 철도 없다. 볼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내면서 서형은 서글프게 웃었다. 나 살아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했던 남편의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서형이 돌아섰다. 나 죽지 않고 살아서 온다. 그 말이 가슴에서 치밀어올라 서형은 가만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렇게 말하고 떠났으면 그 말 하나 바위처럼 믿으며 살면 되는 건데. 여자 속 좁다는 게 이런 건가.

등에 업힌 아이가 오줌을 싸고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진다. 아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서형이 중얼거렸다. 이 녀석아, 좀 참지 엄마 등에 오줌을 지려놓으면 어쩌니. 아빠 있었으면 넌 야단맞을 감이다. 네 아버지는 말이다, 중얼거리는 데 또 목이 멘다. 더도 덜도 말고 네 아빠처럼만 되거라. 그래서 아빠 돌아오는 날, 여기 있소! 당신 아들 여기 있소! 하고 내놓을 아이로만 커주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 아들은 엄 등에 오줌이나 지린대요.

저녁 거리를 걸어가며 서형은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안다. 자식 때문에 산다던 어른들의 말을. 자식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겠냐 하는 말을.


Page 101~

이번에는 서형이 목이 메었다. 말문이 막힌 채 두 여자는 허옇게 눈가루가 날아오르곤 하는 앞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남자들은 떠나가고 죽어가는데, 그래도 남겨놓고 간 그들의 자식을 지키고 길러 내야 하는 여자의 처지가 서럽고도 절절하게 가슴을 적셔왔다. 그러리라. 살아서 견디고 이겨내야 하리라. 그래서 어느날 시퍼렇게 자라날 그 아이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던 이 한스런 세월을 말해야 하리라. 잊지 않고 전해서 알게 하리라. 못난 조상은 이렇게 살았다만 너희들만은 달라야 한다고, 저마다 시퍼렇게 제 뜻 펴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이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그렇게 말이다.


Page 115~

일본에 건너가는 것이니 협화회 회원증을 만들어준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지만, 이런 거까지 챙겨야 하나 싶은 게 또 있었다. 하상이 건네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급한 좀 흐한한 신분증명서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1940년 8월 제2차 코노에 내각이 동아신질서 건설을 국책으로 내세우며 조직된 것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였다. 이 조직은 일본의 군부가 총력전을 펼치기 위해 기존 정당을 모두 해산시키면서 정·재계를 망라해 산업보국회, 대일본부인회 같은 사회단체까지를 산하에 두고 출범시킨 거대조직이었다.

대정익찬회의 출범을 바라보며 조선의 친일파들은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정치적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대정익찬회 조선지부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조선은 경멸과 굴종을 감수해야 하는 협력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사한 기구로 만들어진 것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이었다. 총재는 당연히 조선총독부이었다. 하상이 그 조직의 강원도지부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걸 서형은 알지 못했다.


Page 129~

"부인, 제 말대로 하셔야 합니다. 회사에 더 무슨 말을 할 것도 없어요. 어서 빨리 떠나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명국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서형의 말을 막었따. 더욱 목소리를 낮추면서 명국이 속삭였다. 김지상씨는, 남편께서는 도망을 쳤습니다. 잘한 일이지요. 제가 바로 남편분이랑 같이 도망을 치려고 계획을 세웠던 사람인데, 일을 코앞에 두고 사고가 나서 이 꼴이 됐습니다. 명국은 손으로 다리를 가리켰다. 춘천에서 남편분이랑 같이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랑 셋이 도망을 치다가 그 사람은 중간에 발을 다쳐 되돌아왔습니다.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못 찾은 걸 보면 도망에 성공을 한 거지요. 그러니 부인은 빨리 여기서 나가셔야 합니다. 조사를 다시 한다고 하던데, 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또 끌려가서 당해야 합니다. 게다가, 함께 도망치기로 했다가 돌아온 그 사람마저 징용공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사라졌어요. 여기 없습니다. 저들이 이 일을 다시 건드리는 날에는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닙니다. 이제 또 애먼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패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날지 모릅니다. 왜 빨리 돌아가라는지 아시겠지요? 저녁 배편으로라도 어서 여길 나가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이가 아프다거나 뭐라고 구실을 대면 저놈들도 차라리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Page 133~

춘천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언제가는 지상이 돌아오리라. 나는 그걸 믿어야 한다. 그 믿음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당신이 떠난 집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고 아이는 어떻게 컸으며 집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적어두기로 하자. 적어두었다가 그에게 전하자. 난 이렇게 마음으로나마 당신과 함께 살았다오, 말하기로 하자.

지상이 없는 동안의 집안일이며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을 적기로 한 공책을 반닫이 안에서 꺼내놓으며 서형이 눈을 깜박였다. 공책에는 수실로 엮은 끈에 연필이 매달려 있었다.



아들 태형을 생각하며...

Page 152~

저물어가는 강가에 서서 치규는 아들을 떠올렸다. 목숨은 부지하고 있는가 모르겠다. 언제는 품에 있기를 바란 아들이었나.


Page 153~

추운 세월을 춥게 살겠노라 떠났으니 되었다, 아들아. 왜놈 세상이 되어 몇십년, 이제는 그냥 그렇게 굳어지나 보다, 피 흐르는 생채기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은 쓰라린 생각에 잠을 깬다만, 그러나 아들아, 예나 이제나 소리치며 흘러가는 저 강물소리를 들어보아라. 굶어서 뼈와 가죽만 남은 동포가 칡뿌리를 캐며 연명을 한다만, 저 울울한 소나무를 바라보아라. 저것이 조선의 것이다. 이 땅이 어디로 가겠느냐. 저 산에 조선의 혼이 있고 저 강에 조선의 기백이 묻혀 있다. 어찌 우리가 그렇게 녹록한 민족이었더냐.

애비는 봄이 올 것을 믿으니, 너도 추운 날을 견디며 이 세월을 넘겨야 한다. 어느날 봄이 오고 마당가에서 오동잎이 여린 새순을 피워올리 때면 뒷산에서 뻐꾸기는 울게 되어 있느니라. 그날이 오거든 선산자락에 묻혀 썩어가고 있을 이 애비의 뼈 위에, 그 황토봉분 위에 네가 술 한잔 부어놓을 날이 있으리라는 걸 나는 믿느니라. 거기 무릎 꿇고 앉아 네가 머리를 조아릴 때, 애비가 네 불효를 말하겠느냐. 아니다. 그때 네 어깨에 얹히는 햇빛이 있거든 그게 네 애비의 가슴인 줄 알거라. 그때 네 머리카락을 날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있거든, 살아서 너를 장하게 안 네 애비의 손길인 줄 알거라. 그러면 된다. 아침저녁 문안인사 받으며 자라는 손자들 재롱에 싸여 늙어가지 못함을 내가 어찌 너의 불효라 하겠느냐.



Page 239~

에가미의 아들은 지금 이 국가가 하고 있는 행위를 생각했을까. 이것은 무엇인가. 침략전쟁이며 살육이다. 침략과 살육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하물며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살육을 위해 쓰여도 좋단 말인가. 거기에 무슨 정의로움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카미까제라는 그 이해할 수 없이 이상한 전투에 대해서는 기숙사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떠도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상은 미친놈들! 하고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에가미 노인의 아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목숨을 버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을까. 명예롭게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구차한 자존심이며 왜곡된 명예인가.



Page 244~

오끼나와 비극은 전쟁과 그에 따른 살상의 비극을 넘어선다. 편견과 차별로 오끼나와 주민을 대해왔던 일본은 미군에 잡히면 모두가 사살되거나 강간당한다는 공포심으로 그들을 절망에 빠뜨려 집단자살을 하도록 세뇌했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 주민들을 통해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군부의 음모였다. 그러나 세뇌만으로 이 광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뇌만으로 이 광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오끼나와 주민들이 세뇌받은 그대로, 천황의 나라를 몸으로 지킨다는 국체호지의 정신에 따라 집단자살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는 주민들이 식량을 조금이라도 덜 축내게 하기 위해 군부는 주민들에게 수류탄과 칼을 주며 자결을 명령했던 것이다. 자국민에게까지 가해진 일본군의 가공할 만행이었다.

오끼나와의 참화 속에도 조선인은 있었다. 오끼나와에 끌려와 비행장을 닦거나 여러 공사에 투입되었던 1만명의 조선인 군부(軍夫)와 일본군 위안부 소녀들도 미군의 포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조선인들에게조차, 자신들의 동태나 정보를 미군 측에 알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이어졌다. 오끼나와에 끌려와 있던 조선인들의 죽음은 이토록 무고했다. 왜 그들이 죽어가야 했는가는 그 어떤 논리나 인과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두 나라의 전쟁 사이에 낀 압살, 오끼나와의 조선인은 그렇게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죽어갔다.

와전(瓦全)이라는 말이 있다. 헛되이 아무 보람도 없는 삶을 이어갈 때 쓰는 말이다. 이 와전의 반대되는 말이 옥쇄다. 부서져 옥이 된다는 뜻이다. 와전과 달리, 명예나 충절을 더럽힘 없이 지키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때 쓰이는 말이다.

미군에 의해 일본의 기지들이 하나씩 점령되면서 일본인들은 수없이 많은 '옥쇄'를 감행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이어진 일본군의 패퇴를 두고 옥쇄라른 표현을 쓸 때, 그것은 참패 혹은 전멸과 어떻게 다른가.



Page 339~

쟁의 초기에는 일본노동연맹과 부라꾸민 해방운동을 벌여온 인권단체 수평사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건 조선인의 폭동이라는 시각이 퍼지면서 3주 만에 쟁의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석은 승도의 이야기에서 어떤 길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사람, 단체와 단체가 하나로 뭉치는 연대였다. 힘을 모으는 것. 나뭇가지도 하나씩은 부러지지만 묶여서 한아름이 되면 불에 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

하나같이 어두운 소식들이었지만 우석은 승도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무엇을 느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세상에 나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이 거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나에게는 꿈꾸는 내일이 있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나아가야 한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가슴속으로 일어서는 것들이 있었다. 투쟁의 방법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나 자신을 더 단련해야 하리라. 절치부심은 그럴 때 쓰는 말이다. 사상적 기반이 없는 행동은 주춧돌 없는 집이다. 내 삶의 목표는 저 멀지 않은 곳에서 시퍼렇게 부릎뜬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원자폭탄.

Page 375~

운반차 한쪽을 잡고 우석이 선로에 붙어섰다. 천천히 레일을 따라 운반차를 밀며 우석은 발밑을 보고 걸었다. 그때였다. 눈앞이 한 순간 하얗게 변하는가 했다. 번쩍하는 불빛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귀를 찢는 굉음을 듣는 순간, 우석의 몸이 튕겨올랐다가 나무 밑으로 나가떨어졌다.

우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신과 함께 날아와 우그러져 있는 운반차였다. 그는 그 쇳덩어리와 함께 나무 밑에 쑤셔박혀 있었다. 함께 운반차를 밀고 오던 사람들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우석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귀가 멍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허청허청 발걸음을 옮겼다. 등허리는 열선으로 옷과 살갗이 들어붙으며 일시에 타들어가 검붉게 끓는 듯한 피부에서 한여름 햇살을 받은 벌건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Page 377~

연기 속을 걸어나가자, 팔다리가 이상하게 꺾인 채 길가에 쓰러져 죽은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옆에서는 유리파편이 무수히 등에 꽂힌 한 어머니가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이들을 끌고 어디로 가는지 헤매고 있었다. 아 무언가. 이건 뭐지. 하늘을 쳐다보던 지상의 무릎이 꺾이며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Page 378~

발길을 돌렸다. 옷이 전부 찢어진 채 검붉은 살이 피로 뒤덮인 사람이 다가왔다. 아이를 업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여자가 지상을 지나쳐갔다. 멍하니 지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에 업힌 아이는 머리통이 없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이 피를 흘리는 사람이 팔을 휘저으며 다가오면 왼쪽 길로 피해 달아나고, 팔다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절룩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른쪽 골목으로 피하며, 지상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어깨가 욱신욱신 쑤셔왔다. 날아올랐던 몸이 벽에 부딪쳤다 떨어지며 어깨를 다친 것 같았다. 골목 저편, 휘몰리는 연기 속에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걸어나왔다. 온몸이 타들어가 숯덩어리같이 변한 사람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상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걸음을 내딛고 있었을뿐인데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놀란 지상이 뒤돌아서 큰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강이 있는 우라까미 쪽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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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바라보면서 지상은 아끼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는 대신 무릎 사이로 몸을 숙이며 고개를 꺾었다. 나까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저 여자를 어떻게든 나까다에게 데려다주어야 한다면서 업고 다녔다. 지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할까.

하시마를 빠져나온 나를 살려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일본에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밥을 먹게  해준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사람답게 만났기 때문이다. 미움도 사랑도 아니다. 다만 사람과 사람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다움, 그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가치가 아닌가.

나를. 저 일본사람들을, 아니 우리 모두를 이렇게 내몰리게 한 것은 무엇일까. 전쟁,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저편에 B29를 번득이며 폭탄을 쏟아붓는 미국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들 사람이 만들 것이 아닌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죽이고 불태우고 절멸 시키고 있다. 대가리가 꼬리를 물어뜯으며 짓씹어 제가 제 몸을 죽이는 꼬락서니다. 이 혼돈을 어떻게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다.

우리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무엇이었나. 하물며 제 동포이거늘 천황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라면서 시국강연이랍시고 떼 지어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몬 자들, 징용으로 묶어 보낸 자들, 그 말을 하던 입과 그 글을 쓰던 손을 나는 잊지 못하리라. 친일. 그건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제 한 몸, 제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팔고, 저 자신마저 팔아가며 일본을 위해서 바쳤다. 그래서 얻어마신 단물이 얼마나 많은 동포들의 삶을 부수고 일그러뜨리고 더럽혔는지를 그들은 모른다. 못난 너희들은 그렇게 기어다녀라. 엎어져 신음해라. 나는 너희들을 밟고 저 고깃국과 이밥과 비단이불 속으로 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오늘도 단잠을 자며 살고 있는 거지. 그것밖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 자들에게. 그리고 아, 거기에는 내 아버지도 있었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석이가 말했듯이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함으로써만 지켜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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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이 멀었던 거다. 그건 물 위에 떠올라 있는 눈에 보이는 얼음덩어리였어. 물 위에 떠 있는 것보다 더 큰 엄청난 덩어리가 물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지. 물 위에 떠 있어서 내가 보았던 흰 블라우스나 축음기판이었다면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일본이 군함도였고, 하시마 그 탄광이었고, 미쯔비시라는 조선소에서의 나날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 미친 전쟁, 저 광기와 악의 거대한 덩어리까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이를 갈던 친일파 아들새끼, 그게 나였다. 떠 올라 있는 얼음만 보았지 물속에 잠긴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보지 못하던, 바로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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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밑에 가 기둥에 기대 앉은 우석은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면서 입고 있던 바지를 끌어 내렸다. 바지를 벗어 든 그는 허리춤 안쪽에 바느질 해 놓았던 실을 온 힘을 다해 이로 끊어냈다. 아주 깊이 내 몸에 간직하리라 생각하면서 꿰매 넣었던 금화의 뼈가 거기에서 나왔다. 고향으로 갈 때까지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면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새끼손가락만 한 뼈였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 우석은 사흘을 더 다리 밑에 있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이 왔을 때, 그는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엄청난 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있는 의식의 저편 깊은 곳은 고요했다.

그랬다.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내가 태어나고, 이 살과 뼈를 길러준 곳, 내 조국. 조선의 이름으로 태어나 그 산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고통받았고, 차별받았고, 배고프고 헐벗어야 했다. 오직 조선이라는 것, 그 조국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땅에서 태어났다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이제 조선의 아들이기에 죽어가는구나. 조선인이라는 그것 하나로 죽을 때에도 차별받고 경멸당하면서··· 버림받는구나.

언젠가 오려나. 조국에도 봄이 오려나. 그날 춤추고 싶구나. 노래하고 싶구나. 조국의 산하여. 그날 널 껴안고 내가 미쳐간들 어떠랴.

그의 손이 마지막 힘을 다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금화의 뼈였다. 만대가 지나도 풀지 못할 한을 품고 나는 간다. 후손들아, 우리를 기억해다오. 나라 잃은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이 저주받을 고통을.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는 죽었다.

눈을 감고 단정하게 입술을 닫은, 아무 고통도 없는 얼굴이었다.



 황광희 & 개코 feat. 오혁 _ 당신의 밤. (무한도전 /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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