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 한수산(韓水山)
발행일 : 2016년 5월 20일.
펴낸곳 : (주) 창비
일본 하시마 섬(瑞島, 군함도)에 숨겨진 끔직한 비밀.
군함도...
Page 11~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끼(長崎)는 거대 군수기업 미쯔비스(三菱)의 자본아래 놓여 있는 항구도시였다. 이 나가사끼로부터 18.5킬로미터 떨어진 섬 타카시마(高島)에서는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미쯔비시 타카시마탄광이 성업 중이었다. 다시 이 섬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 하시마(瑞島)였다. 이 무인도에서 석탄이 채굴되면서, 물도 풀도 나무도 없이 오직 채탄시설과 광부숙소만으로 뒤덮인 곳이 미쯔비시광업 하시마탄광이었다. 맨 위에 서 있는 신사를 중심으로 섬 전체를 둘러 싼 드높은 방파제 때문에 하시마는 그 모습이 바다에 떠 있는 군함 같아서 사람들은 하시마라는 이름 대신 군함도라고 불렀다.
군함도 1 / 한수산
책은 작년에 샀다. 아마도 책이 출간되고 나서 1개월 지나고 산 것 같은데...
거의 반 년(?)동안 책꽂이에서 잠은 자던 책을 해를 넘겨서야 읽고 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조선의 나라가,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당해야 했던... 징용.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위해서 강제로 끌려가서 인권을 짓밟히며 목숨까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게 된 많은 사람들.
본래의 이름보다 군함도로 더 많이 불리는 하시마 섬.
석탄을 캐는 광부로 끌려가서 일본이 만들어 놓은 죽음과 부딪히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린 소설이다.
처음 하시마 섬에 온 지상은...
화도 나면서 어떻게 버티면서 생활을 하나 걱정을 하지만 점점 현실에 적응이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진다.
지상의 학교 친구인 우석은 금화를 만나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으며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일본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덩달아 석탄을 캐는 양도 늘어나고, 늘어나는 석탄만큼 작업환경은 더욱 나빠져 다치는 사람, 불구가 되는 사람,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아진다.
결국... 지상과 우석, 명국은 섬을 탈출하기로 다짐을 하게 된다.
자유를 찾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역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2017. 01. 19. 목요일.
2015년 무한도전 촬영.
: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392750&memberNo=16220685&vType=VERTICAL
조선인들에게는 눈물의 섬... 하시마 섬(瑞島)
: http://cafe.daum.net/lcju/GuSu/78?q=%B1%BA%C7%D4%B5%B5%20%C0%A7%C4%A1
다카시마(高島) _ 다음 백과사전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b239
하시마(瑞島) _ 위키 백과사전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8B%9C%EB%A7%88_%EC%84%AC
하시마 탄광 _ 다음 백과사전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XX27#28230872
김지상과 아내인 서형의 헤어짐.
Page 82~
이제 떠나야 할 사람. 그리고··· 보내야 할 나. 벗은 몸으로 누워 자신의 가슴에 엎드린 남편의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서형은 생각한다. 좋은 사람. 이 좋은 내 남자. 마음 무겁지 않게 떠나보내리라. 묻어둬야 한다. 이 좋은 사람에게 나도 좋은 여자가 되어, 뻬앗기는 것만 서러운 이런 여자의 마음자락은 묻어두어야한다.
뜻없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은 소리없이 눈가를 흘러 베개 위로 젖어들었다.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왔던 베갯모. 그녀의 머리칼이 흘러내린 베갯모에는 오래 살라고 수놓은 목숨 수(壽) 자를 두 마리의 학이 에워싸고 있다.
Page 84~
조선의 딸.
서형은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 그래요, 아버지가 가르치셨지요. 조선의 딸, 조선의 여자로 살라고 말입니다. 기다리라고요. 참으라고요. 반도는 대륙의 끝이고 섬의 시작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반도에 사는 여자는 섬 여자와도 대륙의 여자와도 달라야 한다고 하셨어요.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아는, 그러나 분연히 일어설 때를 아는 조선여자의 기개. 그게 조선의 여자이니라.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서형은 손바닥으로 눈 밑을 훔쳐냈다. 기다리면 되겠지. 세월이 약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기다려서 때가 차면 오겠지. 그 남자가 어디 가겠는가, 돌아오겠지. 그래서 그때 옛말하며 살지.
Page 86~
역으로 뻗어 있는 금강로 큰 길을 걸어 춘천보고 앞을 지날 때였다. 지상은 학교 건물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루가 깔린 복도, 소실점을 이루는 복도 저 끝까지 울리던 바퀴 달린 교실 문소리. 학교를 드나들던 때는, 그랬다, 그때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용솟음치던 때였나. 꿈도 많고 희망도 컸건만 오늘 나는 이 앞을 걸어서 징용을 나간다. 끌려간다.
Page 88~
"그래도 그렇지요. 역에라도 나가면 안 될까요. 당신이 가는데···"
서형은 그렇게 말끝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징용을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지상은 아내를 역에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하늘을 보자. 여기서 네가 보는 하늘이나 내가 그 땅에 가서 보는 하늘이나 하늘은 하나가 아니겠니. 하늘을 볼 때마다, 같은 별 같은 구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것이 아내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Page 93~
잘 가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오실 때는 제가 기다리는 때입니다. 잘가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Page 94~
기차시간이 다가오자 서형은 우산을 찾아 들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눈물이 지가간 가슴은 썰렁하도록 텅 비어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당간지주 옆에 와 서니 멀리 역사 지부이 흐릿하게 바라보였다.
바람이 그녀의 치마폭에 빗발을 뿌리며 지나갔다. 우산이 흔들렸다. 그때였다. 역 쪽에서 기적소리가 울려왔따. 길게 한번, 짧게 두번, 서형의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뒤집히며 나뒹굴었다. 그녀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당간지주를 손으로 잡았다.
징용(徵用)의 두려움 속에서 같은 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 상록회(독서모임) 회원이었던 최우석의 만남.
처음으로 느껴보는 나라.
Page 90~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시식량 확보를 위해 취했던 농산물 수탈정책이 공출(供出)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잡곡만이 아니라 고사리같은 산나물까지 강제수매를 당했고, 심지어 솜, 베를 비롯한 옷감까지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은 처참한 궁핍속으로 떨어져갔다. 공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제사에 쓰는 놋그릇에서부터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절간의 종까지, 쇠붙이는 모조리 훑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의 어린 시절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대지주는 아니었다 해도 일제에 협력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재산을 일궈가던 집안에서, 어린아이가 느낄 궁핍의 그림자는 없었다.
Page 91~
처음으로, 징용이라는 말이 처연하게 지상의 가슴을 어지럽혔다.
나까무라 에쯔꼬.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여선생님을 일본이라고 이해했던 자신을 그는 떠 올렸다. 검정 치마와 흰 블라우스, 뒤로 묶어 내려뜨린 긴 머리. 지상에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묻혀 있는 나까무라 선생의 모근 것이 바로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나까무라 선생의 나라 일본. 풍금을 잘 치던 나까무라 선생처럼, 지상이 생각하는 일본은 총독부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한 나라였다. 나까무라 선생의 일본은. 그 일본이 집안의 놋그릇 제기까지 걷어가는 총독부의 일본으로 변해갔다. 나까무라의 일본과 총독부의 일본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괴롭게 뒤엉키던 파열음, 그 혼란스러움을 지상은 기억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본의 몸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반도인 만나게 될 저 내지라는 이름의 일본은 또 어떤 모습일까.
Page 101~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그랬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손아귀가 자신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행렬에 끼여 앞으로 나아가며 옆사람의 몸에 부대끼면서, 지상은 한 발 한 발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마음을 다 잡으려고 그는 고향을 떠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그리고 형, 형이 있었지. 이 항구를 제 발로 드나들었을 형이다. 그래. 두려워 말자. 형이 밟았던 항구를 이제 나도 밟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Page 114~
"이제부터는, 한 발짝 옆이 바로 죽음이야. 옆에 죽음을 끼고 살아야 해. 그게 이제부터의 우리 삶이야."
삶이라니. 여기 와서 삶이라는 말을 내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지상은 우석의 눈을, 차갑게 번득이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너 뭐 하던 사람이니?"
"부모도 못 모시고 자식도 못 길렀다, 왜?"
"만나서··· 고맙다."
"도련님, 그런 말씀은 거두시고 남의 눈에 안 띄게 좀 조용히나 있으시죠. 내 입에서 또 삼촌 소리 나오게 했다간 봐라."
Page 118~
갑자기 저쪽에서, 이쪽에서, 사람들이 운다. 눈 밑을 훔치고, 으흐흐흐 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는다. 지상도 무릎 속에 얼굴을 묻었다.
이것이었구나. 나라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지상은 처음으로 나라라는 말을 생각했다. 내놓으라면 그게 어디 곡식만이었나. 조상님 제사 모시던 유기그릇까지 다 꺼내주어야 했다. 가자고 하니까 여기까지 끌려왔다. 그러고도 이제 또 서라면 서고, 때리면 맞아야 한다. 왜 우리가 이래야 하는가.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주인이 아니다. 이제야 알겠다, 나라가 없다는 게 무엇인가를.
하시마 탄광.
Page 143~
하시마의 출입구, 섬으로 들어오거나 떠날 때 건너야 하는 다리, 선착장에 떠 있는 부교를 산바시(桟橋)라고 불렀다. 하시마의 산바시 앞에는 지하터널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섬으로 들어오던 그날 밤 자신들을 떨어뜨릴 듯 흔들어대며 요동치던 접안시설인 산바시, 그 바로 앞에 캄캄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문이었다. 아침이면 줄을 맞춰 숙사를 나온 징용공들은 이 문으로 들어서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광부들이 지옥문이라고 부르는 문이다.
여기서 시작되는 지하터널을 걸어서 타떼꼬오에 도착하면 계단을 올라가 케이지가 있는 마끼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 계단을 하시마의 광부들은 '목숨계단'이라고 불렀다. 목숨을 걸고 올라가야 하고 목숨을 부지해서 내려와야 하는 계단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목숨계단을 올라 시설계에서 채탄장비들을 지급받고 나면 공포의 쇠통 케이지가 기다린다. 거기서부터 쏟아지듯 떨어져서 가닿는 지하 700미터의 거리, 그 바닥이 갱도의 시작이다. 바다 밑 사방 2킬로미터가 넘는 주변에 좌우 앞뒤로 수많은 지하갱도가 뚫려있다.
갱도 안의 작업은 땅을 파며 갱도를 만들어나가는 굴진(掘進), 땅속의 석탄을 캐내는 채탄, 캐낸 석탄을 땅 위까지 옮겨 나르는 운반으롸 나눠진다. 굴진, 채탄, 운반. 자신이 어느 작업에 배정되었느냐에 따라 행선지가 갈린다. 징용공 전원은 채탄작업에 투입 되었다.
비교적 펑탄하게 갱 바닥을 이동해 운반차 진샤를 내리면 이때부터는 다시 경사지게 파내려간 갱도를 걸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조를 따라 곡괭이질을 할 채탄현장까지 가면 그곳이 갱도의 마지막, 카리하(切羽)라고 부르는 곳이다. 최선단 채굴현장, 그들의 피와 땀을 부르는 일터였다.
현장 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첫날의 그 길, 목소리를 모아 마끼자! 타떼꼬오! 하고 소리치며 시작된 길은 이제부터 매일 그들이 오르내려야 할 길이었다. 기나긴, 막막하도록 먼 거리. 그 길을 가고 오며 그들은 말을 잃었다. 갱도의 규모와 낯설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한 시설물에 탄성이 터지고 압도당하던 순간순간··· 그랬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곧이어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손톱이 빠지게 기어나가며 허우적거려도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 그것은 늪이었다. 끝없이 넓고 아득해서 건너편이 보이지조차 않는 절망의 늪이었다.
Page 170~
쇄암기라고 바위를 깨는 드릴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탄가루가 날아오르고, 숨 막힐 것 같은 더위와 습기 속에 웃통을 벗고 곡괭이를 휘두르며 느끼는 것은 여기까지 끌려오며 느꼈던 절망이 아니었다. 내일을 기다려보자는, 해낼 수 있으리라는, 어떻게든 살아 남으리라는,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으리라는 유예가 이제까지의 절망에 틈을 비집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달랐다. 여기가 끝이로구나, 더 어디로 빠져나갈 길이 없구나 하는 절망의 암벽이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일의 공포가 아니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나 있을지··· 그것부터 무서움이 되어 전신을 휩쌌다.
Page 203~
지상은 하루하루 이런 나날에 길들여지는 자신이 몸이 떨리게 싫었다. 익숙해져간다는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까지 바다를 두덮은 안개는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안개 속에 서면 숲은 보이지 않는다. 겨우 앞에 있는 나무만이 보일 뿐이다. 나는 지금 안개 속에 있다. 좀 더 넓게 그리고 깊이있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와 있는 나는 무엇인가를 말이다.
Page 208~
그 달의 월급명세를 지상은 들여다보았다.
건강보험 1엔 50전. 퇴직적립금 3엔 5전. 거기에 국채회비가 34엔이나 되고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국민저금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려 52엔 30전이다.
거기에 료오히라는 이름으로 방값까지 제하고 나니 어쩌면 이러 수 있나 싶게 받는 돈에는 오직 한 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현금 지급 0. 그게 전부다. 월급 전체가 85엔 37전인데 누가 이렇게 숫자를 잘도 꿰어맞췄는가 싶다.
모두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지, 월급 액수에서 이것저것 제하고 남은 우수리가 붙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나마 전표로 주었다. 그것으로 배급이 있을 때 매점에서 담배나 청주를 살 수 있다고 했다.
회사 직영 탄광에서는 이미 사라진 제도였는데 징용공들에겍만은 여전히 이것을 적용하여, 공제액을 뻬고 몇푼 남는 돈도 현금이 아닌 전표로 대신하고 있었다. 숙사 밖을 나가 어슬렁거릴 시간도 없는데다 그럴 처지도 아니었기에, 어차피 돈이 있다고 해도 회사 직영 매점밖에는 물건을 살 곳도 돈을 쓸 곳도 없긴 했다.
Page 214~
우석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돈 때문에 일하지만, 난 달라. 난 분해서 일한다. 분해서 탄 캐고 분해서 잠을 자."
우석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분노 때문에."
지상은 그가 한 말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분노. 분노 때문에 탄을 캐고 분노로 잠을 잔다. 멀리 방파제 너머 바다로 눈길을 보내며 지상은 처연한 생각을 한다. 분해서 잠을 자고 분해서 밥을 먹는가, 친구여 너는.
지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나는 무엇으로 탄을 캐고 무엇으로 밥을 먹는가. 왜 나는 서러움밖에 없는가.
Page 272~
그때 숙사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세 사람이 엉켜서 밖으로 나왔다. 떠드는 소리에 바라보니 가운데 한 사람을 놓고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성식을 데리고 나온 우석과 일주였다.
"우석아, 왜 그러니?"
"성식이 녀석이 꼴에 주사를 부린다. 한잔 먹더니 쿨쩍쿨쩍 울고 야단이다."
"애들 보는 데서는 냉수도 먹지 말라잖아. 애한테 술을 먹였으니."
지상이 다가갔다.
"귀한 술 먹고 울기는 이 녀석아. 아니, 참새 눈물만큼 먹은 술에 취해?"
훌쩍훌쩍 또 울기 시작하던 성식이 지상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형님, 지상이 형님. 나 고향에 가고 싶다구요! 나 좀 고향에 데려다줘유. 갔다가 다시 올 테니깐 한번만 데려다줘유."
고향, 성식이 말한 그 고향이라는 말이, 둘러서 있던 그들의 가슴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했다. 고향. 그래 너만이 아니다. 고향에 가고 싶은 게 어찌 너뿐이겠느냐. 지상이 성식의 머리를 쓸어 안았다.
"그래, 가자. 고향에 가자. 언젠가는 가자."
"형님, 나 지금 가고 싶어유."
지상은 무어라 해줄 말을 잇지 못해 말없이 서 있었다. 우석이 말했다.
"그래 성식아, 고향 가자. 들어가서 자면서 꿈속에서 만나면 된다. 고향이란 게 그런 거다."
Page 327~
진찰실 쪽으로 지상을 불러놓고 이시다가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선생님 말씀이, 수술은 잘 끝났답니다. 그런데 이런 게 있어요. 다리를 다친 환자의 경우에 이따금 보게 되는 건데요. 다리가 없어진 걸 한동안 실감을 못 해요. 자기 자신이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 실감을 못 한다는 얘기에요. 문제는, 그러다가 퇴원을 할 때예요. 비로소 실감을 한다고 할까요. 환자도 그때 제일 많이 괴로워해요.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야 한답니다. 또 있어요. 환자는 한동안 다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요. 심하면 없는 다리가 자꾸 가렵다든가, 발이 시리다든가.
멀리 바다가 무심하게 펼쳐져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원 앞에 서서 이시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우석과 금화의 만남.
Page 174~
금화가 방파제 위로 올라섰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날린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같은 날은 멀쩡한 년도 바람나고 싶겠다. 저건 아예 누구 가슴을 후벼파자는 노릇 아냐. 술이라도 안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저만큼 앞서 걸어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금화는 지켜보았다.
Page 184~
말하면서 금화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석의 선명한 콧날과 생각 깊어 보이는 눈을 마주 보면서 그때 금화는 가슴 한편이 찌르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 같구나, 이 남자. 이런 눈빛을 본 게 언제인가 싶다.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혔다. 유난히 검은 자위가 가득한 것 같은 금화의 눈빛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Page 184~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우석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느느니 한숨밖에 없구나. 숙사에 가 누울 생각을 하자니 지상이 떠올랐다. 잠이나 자겠다고 일찍 드러눕던데 그 녀석도 안됐다. 일본사람 세상 좋은 시절 만나 배 두드려가며 살 팔자인 줄 알았을 텐데, 친일파 아버질 두고도 여가 와 앞어졌으니. 그래도 사람이 세상 탓을 하게되지 제 팔자를 나무라겠는가.
그런데, 왜 저 여자 목이 이렇게 눈에 밟히나. 희고 긴 목과 애처로워 보이기만 하던 그 목덜미. 눈은 왜 그렇게 검고 깊은 거지. 꿈결 같았는데··· 아서라, 그래 꿈이다. 네가 무슨 여자를 아니.
Page 191~
바닷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갔다. 일어 설 생각도 없이 금화가 바다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어디 살아 있다고나 할까. 제 목숨 건사도 제가 못 하며 사는 게 조선사람. 하루 살면 하루 고생. 어쩌다가 남정네들은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람."
납덩이를 얹어놓은 듯 무거운 마음에 여자의 말이 와 얹혔다. 우석이 느릿느릿 말했다.
"세상은, 우리가 다 함께 사는 게 세상이다. 나한테는 남의 일이지만 그 사람한테는 손톱 밑에 가시만 끼어도 아픈 거, 그게 세상이다. 남의 일이냐 내 일이냐, 남의 탓이냐 내 탓이냐, 그렇게들 사니까 우리가 이 모양인 거야. 남의 일이 아니라 그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거다."
우석을 바라보는 금화의 눈이 반짝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혼자서는 안 되는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무릎 꿇고 살아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살 수도 없고. 그러니 싸워야 해. 싸워도 함께 싸워야 해."
······
우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금화는자지러들 것만 같다. 금화의 마음 한편이 발바닥을 간질이듯 즐겁다.
"남자들은 이 섬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제 발로 온 사람 없어. 속아 오지 않으면 수리한테 채인 병아리 꼴로 끌려 온 사람들이야. 분하고 원통하기로야 마찬가지지."
함께 살고 함께 싸워야 하는 게 세상이라는 이런 남자, 이 남자는 도대체 뭐람.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우석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Page 194~
금화가 무엇을 집어던지기라도 하듯 어둠 속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나 저쪽에 살아. 저어··· 위."
그녀의 손끝이 찍듯이 가리킨 곳은 영화관이 있는 50호동과 공민관 뒤편 언덕이었다. 거기 몸을 숨기듯 엎드린 목조건물이 유곽 혼다야였다.
하시마에는 혼다야 외에 모리모또야와 요시다야까지 술과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는 유곽이 세곳 있었다. 그 가운데 둘은 일본인들이 이용하는 집이었고, 요시다야만이 섬에 들어와 있는 조선인 광부들이나 섬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중국인들이 드나들었다. 유곽 요시다야는 주인도 일하는 여자들도 다 조선사람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금화가 천천히 머리를 들며 말했다.
"저기서는, 내 이름은 하나꼬야."
유곽 혼다야에는 조선여자가 금화 혼자였다.
남편 지상을 기다리는 서형.
Page 195~
밖은 새벽이었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날과 다른 것 없이 서형은 밖으로 나와 펌프로 물을 올려 세수를 했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마당을 지나 물 한 그릇을 올려놓은 소반을 들고 뒤꼍으로 나왔다. 지상이 집을 떠난 후 하루도 거른 적이 없는 그녀만의 새벽이었다.
Page 196~
물그릇을 내려다보던 서형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사옵니다. 저희들 모든 일을 관장하시는 신령이시여,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남편이 건강하기만을 빌 뿐입니다. 저희들 사는거야 늘 어제 같기만을, 무탈했던 어제 같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고개를 들던 서형이 아랫배를 잡으며 깜짝 놀란다. 뱃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했나 보았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서형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보세요, 아기 뱃속에서 발길질을 해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며 남편의 손을 당겨 배를 만져보게 해야 할 일일,ㅏ 이것조차 나 혼자 겪는구나. 서형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별걸 다 서운해하고 힘들어하는구나.
~~~
지상이 떠난후 서형의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런다고 내 뜻이 바라를 건너가랴 산을 넘어가랴. 그런 생각을 한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서형은 자신에게 말했었다. 다 나를 위해서지. 이렇게라도 하면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서 하는 거지.
지상과 서형의 아들이 태어나다.
Page 261~
아이 이름은 외할아버지께서 명조(明照)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친정으로 올 때 아버님께서, 아이 이름은 한학에 조예가 있으신 사돈어른께 부탁드린다고 한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항렬인 명 자에 아버지께서 빛나게 비추라고 조 자 하나를 넣어주신 겁니다.
창씨개명 때문에 일본 이름도 지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아끼떼루라고, 그렇게 부르면 된답니다. 무슨무슨 따로오(太郞)니 사부로오(三郞)니 하지 않고 그냥 명조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시절이 시절인데 어쩌겠습니까.
Page 262~
잘 키워야지, 당신 안 계시는 동안 부그럽지 않게 길러야지, 하면서 또 스스로 웃는답니다. 어떻게 기르는 게 잘 기르는 건지, 그걸 모르니까요.
정직한 아이로 기르고도 싶고, 훤칠하게 잘 생긴 아이로도 기르고 싶고, 그러다보면 정직한 아이는 훤칠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던가 생각하며, 스스로를 어리석어합니다. 당신이 늘 의롭게 살면 된다고 하셨듯이 그렇게 의로운 아이로 자라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합니다. 세상이 험한 때라 의롭게 산다는 게 더욱 어려운 일인지를 모르지 않으니, 이게 자식 기르는 마음인가 싶습니다. 마음고생 없이 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렇게 한 평생 살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또 하루가 갔구나, 아이와 함께 잠이 듭니다.
Page 265~
숙사로 걸어들어오며 우석은 지상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희망이 아니겠니. 그 얘들이 크면 우리는 또 한 자락씩 희망을 얹어 그 애들에게 자리를 넘기면서 내일을 꿈꾸는 거 아니겠니. 축하한다, 지상아."
Page 269~
사람들에게 떠 밀리듯 지상이 일어섰다. 지상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열냥 주고 집 사고 백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 아마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물설고 낯설다고 해도 어디 여기에 비하겠습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와서, 그래도 서로 이웃이 되어 지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고, 다들 어려운 때에 그래도 여러분들이 옆에 계시니 한결 위안이 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자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좋다거나 어떻다거나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시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Page 281~
치규가 천천히 담뱃대에 잎담배를 눌러 넣었다.
"유교의 조종( 祖宗)이 공자라면 증자는 그 학설을 전한 사람이고, 공자의 손자가 되는 자사가 그것을 이었는데, 맹자가 바로 그 자사의 문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지."
늘 듣고 하던 아버지의 말을 서형은 고개를 숙인 채 듣는다.
"생도 내가 구하는 바요 의도 내가 구하는 바이지만, 두가지를 다 겸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생을 버리고 의를 찾겠다고 한 게 맹자였어. 그 혼탁하던 시대에 천하를 주유하며 정의와 도덕을 위해 자신의 기개를 굽히지 않은 분이 맹자였거든. 오늘처럼 어려운 세상에서는 그래서 더욱 맹자의 가르침이 귀감이 되지 않겠느냐."
Page 284~
잘 왔다 간다. 혼자 와서 둘이 되어 간다. 한 여자가 와서 어머니가 되어서 간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이 거기 성에처럼 지상이 없다는 서러움이 끼지만, 이제부터는 더 의연해야 하리라. 서형은 설렁설렁 바람이 들어오는 가슴을 다독거린다.
Page 285~
무심히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데 한동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서형에게 고개를 돌리는 얼굴이 울먹거리고 눈에 핏발이 서 있다. 서형이 다가서며 소리 없이 웃는데, 다 웃지 못하고 서형도 얼굴이 일그러진다.
"무슨 일인데 그래?"
"있잖아유, 마을에서 다들 뭐라는지 아세유?'
"동네에서 뭐해?"
"누님 이제 혼자되신대유."
"흉한 소리를 다 한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다들 그래유. 요새 징용 나간 사람치고 성해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대잖아유."
"네 마음이야 알지만, 그런 생각일랑은 하지 마라. 사람마다 다 같을까."
봄 와서 꽃 피고 나물 캐다보면 여름도 있고, 빨래 버석버석 마르는 가을볕도 있는 법. 아직 나이 창창하고 이젠 이 어린것까지 있는데, 지내노라면 좋은 날 오는 거 보고 살겠지. 어디 세월이 이렇기만 하겠니. 먼 산을 봐라. 저렇게 아우성치듯 검푸르지 않니. 산을 보고 살고 강을 보면 살지. 그렇게 살면 되는 거란다."
상록회.
Page 294~
상록회. 그 독서모임이 우리에게 남긴 건 뭘까. 확인이자 가능성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저 땅속에 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는 거, 다 고사한 나무가 아니라는 거, 5천년 역사가 어찌 몇십년에 거덜이 나겠는가 하는 믿음을 일깨운 거 아닐까.
Page 296~
다들 파밭처럼 싱싱했다고 우석이 말한 그 시절, 지상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샘밭 집으로 놀러간 지상에게 태형이 보여준 노트에는 꿈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상록회, 우리들은 순결하고 풋풋하다. 물안개 피어나는 소양강의 새벽처럼 우리의 뜻은 아름답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꿈과 의지는 원대하다. 푸들푸들 살아 움직이는 정신으로 우리의 젊음을 바쳐 그것을 사회에 접목시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끝내 이루고자 하는 조선독립과 그 독립운동의 핵심이 될 인재를 기르기로 한다는 지평은 얼마나 창대한가.'
"형님. 저 이거 베껴가면 안 될까요?"
"남의 일기를 베껴가겠다는 사람도 있냐."
"너무 좋아서 그래요."
Page 297~
비밀결사의 뜻을 모은 첫 만남은 3월 14일 이루어졌다. 상록회의 탄생이었다. 창립회원들은 자기완성, 지도자로서의 책임 완수, 단결력 배양, 그리고 자신들이 민족의 악습으로 인식했던 파벌투쟁의 배척에 마음을 모으고 조선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것을 결의 하기에 이른다.
산학에 독서회를 두었는데, 책을 서로 돌려 읽은 만남은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상록회가 그 활동을 표면화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절묘한 것이었다. 책을 윤독하면서 회원들은 월례회를 가지고 독후감 발표, 토론, 민족의 장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밝히는 연설 등을 전개했다.
Page 368~
지상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우린 왜 이렇게 되었나. 왜 여기까지 끌려왔으며, 이제 목숨을 걸고 여길 나가야 하는가. 살기위해서다. 산다는 건 뭔가. 그건 자유다. 나는 지금 자유를 찾아서 나가려는 거다. 자유란 게 뭐냐. 그건 간단하다. 내 나라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할 말을 하며,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곳, 그걸 할 수 있는 게 조국이라면 우린 거기서부터 잘못됐던 거야. 나라를 잃었다는 바로 그거. 내 나라 말도, 내 나라 글도, 제 이름조차 잃어버린 우리들. 이게 그 시작이다. 이름을 찾고 말을 찾고 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찾아가는 시작인 거다.
탈출?
Page 218~
사람의 결심은 작은 것에서 온다. 결심이 크고 굳다 해서 그 시작도 큰 것에서만 오지 않는다. 작은 씨알이 크게 자라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며 솟아오르는 것처럼, 결심도 그 시작은 작은 씨앗이었다.
쥐가 그랬다. 지상이 몸을 털고 일어서도록 불러일으킨 건 쥐였다. 목덜미를 간질이며 입을 타고 나가던 쥐의 그 발톱을 그는 결코 잊지 못했다. 결심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 결심을 서형의 편지가 안아 올렸다.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파도를 내려다보며 지상은 서형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이 섬을 빠져나간다. 쥐가 밟고 가는 나를 여기 이대로 처박아둘 수는 없다. 목숨을 건다, 서형아. 알겠니.
Page 222~
천천히 몸을 일으킨 명국이 지상을 마주 보며 섰다. 그의 눈이 간절하게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명국의 손이 나와 지상의 팔을 잡았다.
"그래서, 이섬을 빠져나가겠다는 각오야?"
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눈길이 얽히는 사이. 침을 삼키며 지상은 목이 아팠다. 명국이 말했다.
"함께, 가겠나, 나랑?"
지상이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바다가 뚫리면서 길이 열리듯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서 뻗어나와 서로에게 엉키고 있었다.
Page 383~
우석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금화가 말했다.
"네가 여기 오래 있게 되면, 언젠가는 나 혼자 어디론가 내뺄지도 몰라. 그때 내가 널 버리고 간다고 할까?"
잠들지 못한 갈매기 하나가 울고 갈 뿐, 우석은 말이 없다.
"넌, 나한테 다 하고 있잖아. 누구랑 어떻게 도망친다는 엄청난 애기도 다 말해주고, 찾아와 만나주고. 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 여자야. 그런데 너는 그걸 하고 있잖아. 난 그게 고맙고 기쁘고 눈물겹고 그래. 이 남자한테 마음 주길 잘했구나. 금화야 잘했구나. 그게 내 마음이야. 전부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 만나서, 나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는, 그 고마움은 잊지 못할 거라는 애길 하는 거야."
Page 389~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다. 금화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기 시작한 후회가 차츰 부끄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게 나서는게 아니었어. 이런 마음일 줄을 누가 알았겠나.
"사람 대접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기나 하세요? 목숨이 질겨서 살았지, 사람 대접 받아서 산 줄 아세요?"
얼굴을 가려던 손을 힘없이 무릎 위에 떨어뜨리면서 금화가 중얼거렸다.
"술 처먹고, 울고, 그러다 매 맞아 멍이나 들면서, 그러겠지요. 나 같은 년이 그렇게나 살아야지요. 그게 아저씨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아니던가요.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답니다. 그 남자를 보내놓고나서 술 처먹고 울면서 마음 못 잡을 거면 차라리 따라나서자. 왜? 나도 사람이니까. 나도 사람이라는 걸 그 남자가 가르쳤으니까, 그랬던 겁니다. 이게 내 생각만 한 건가요? 이것도 욕심인가요? 그랬기 때문에, 똑같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보낸답니다. 그게 어떤 길인데 따라나서나요. 저 그렇게 미련하지 못해요."
어금니를 물며 명국이 눈을 감았다. 정이었구나. 첫정이었구나. 험하게 산 세월이 산 넘어 산이려니 짐작했지만 우석이 만난 게 네 첫정인 줄은 몰랐다. 낡고 해져서 여기까지 밀려와 헐벗고 살기에... 밟혀도 다시 돋는 풀인 줄 알았다.
Page 411~
금화가 낮게 물었다.
"나 당신한테 무슨 말 좀 해도 돼?"
스스럼없이 당신이란 말이 나왔다.
"해. 무슨 말?"
"나 관우 장비한테 칼 버리고 붓 잡으라고는 안 해. 꽃을 그리고 나비 그릴 손이 따로 있지. 나 그런 여자 아냐. 그러니 부탁이야.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기답게 살아. 우석이답게 살아."
우석은 말없이 들었다.
"당신이 나 사랑해준 거, 곱게곱게 잊지 않고 살 거야."
금화의 허리를 감은 팔에 우석은 힘을 준다.
"또 해도 돼?"
"해. 하고 싶은 말 있음 다 해."
"큰 북에서 큰 소리 나고, 큰 나무가 큰 집을 지어. 나야 이렇게 살다 이렇게 가겠지만, 당신만은 다르게 살아야 해. 그래야 나도 눈물 마르면서 살지. 날 위해서라도 그래줘야 해. 내 마음 알아?"
"그래 고맙다."
"춥다고 거문고 부숴서 불 때겠어?" 당신만은 그렇게 살면 안 돼. 세상이 다 엎어져도 당신은 그러면 안 돼. 약속해."
Page 414~
행복이라는 말이 다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니. 행복. 인연 없는 말로 알았던 행복이라는 거. 금화는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뜻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여자의 행복에는 이런 것도 있는 거야. 좋은 신랑 만나 깨소금 콩콩 빻아가며 명절이면 새끼들에게 새 옷 입혀가며 사는 거, 그것만이 여자가 가는 길은 아니라는 걸 우석아, 난 너 때문에 이제 알게 된 거야. 그래서 행복해. 이런 행복도 있다는 걸 알아서 말이다. 팔자 좋은 여자들,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다. 그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며 사는 여자들, 그런 여자만 세상 사는 기쁨을 알고 가는 건 아니란다. 그렇지. 그건 여자는 내가 지금 껴안고 있는 이토록 가슴 미어지는 행복을 알 리가 없다. 가슴이 찢어지고 저미는 것 같은, 이 서러운 행복을 그 여자들이 어찌 알겠어.
Page 479~
"난 갑니다."
뒤도 볼아보지 않고 금화는 방파제를 걸어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장막이 되어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잘 계시오. 그렇게 중얼거리며 금화는 걸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그녀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잘들 계시오. 사람에게는 팔자가 있고, 그럼, 운명이 있지. 그렇다면 나라에도 그런 게 있겠지. 오리나무는 십리 밖에 있어도 오리나무고, 고향목은 타관 땅에 서 있어도 고향 나무다. 우석이 언젠가 했던 말을 그녀는 떠올린다. 사람이 갈 길이 멀다고 다 바늘허리에 실 매며 사는 건 아니다. 그런 말도 떠올린다. 그랬었지, 너는. 그러나 넌 바로 그 바늘허리에 실 맨 사람이 나라는 여자란 건 생각지 못했던 거야. 되지도 않은 일을. 너를 만나 같이한 시간은 짧고 짧았지만, 그게 내게는 때때옷이고 꼬까옷 같은 세월,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라는 걸 말이다. 고마워. 고마웠어.
아. 바람 속으로 안개가 짙구나. 밤안개가.
'하루, 또 하루 > 여백이 있는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 6 _ 김진명 (0) | 2017.03.09 |
---|---|
군함도 2 / 한수산 (0) | 2017.01.20 |
겨울편지 / 이해인 수녀 (0) | 2017.01.03 |
힘 _ 박시교 (0) | 2016.10.17 |
새벽... (0) | 2016.09.21 |
댓글